장바티스트 베시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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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바티스트 베시에르는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한 프랑스 원수이다. 1768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의학을 공부하다가 군에 입대하여 용맹함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나폴레옹의 눈에 띄어 신뢰를 얻었고,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며 사단장, 원수로 진급했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프리틀란트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으며, 스페인 방면군 사령관으로도 활동했다. 1813년 뤼첸 전투 직전 정찰 중 포탄에 맞아 사망했다. 그는 뛰어난 기병 지휘관이자 황실 근위대의 행정가였으며, 나폴레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독립적인 지휘 능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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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티스트 베시에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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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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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
출생일 | 1768년 8월 6일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프레사크 |
사망일 | 1813년 5월 1일 (44세) |
사망지 | 작센 왕국 바이센펠스 |
별칭 | 해당 정보 없음 |
묘소 | 해당 정보 없음 |
군사 경력 | |
소속 | 프랑스 왕국 프랑스 제1공화국 프랑스 제1제국 |
복무 기간 | 1792년 ~ 1813년 |
최종 계급 | 제국 원수 |
참전 전투 | 1792년 8월 10일 봉기 프랑스 혁명 전쟁 피레네 전쟁 불루 전투 검은 산 전투 바스카라 전투 이탈리아 전역 로베레토 전투 리볼리 전투 마렝고 전투 프랑스 이집트-시리아 원정 아크레 공방전 아부키르 전투 나폴레옹 전쟁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아우스터리츠 전투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아일라우 전투 프리틀란트 전투 반도 전쟁 메디나 데 리오세코 전투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바그람 전투 발헤렌 전역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 보로디노 전투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뤼첸 전투 |
서훈 | |
훈장 |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 철왕관 훈장 사령관 뷔르템베르크 왕관 훈장 대십자 성 하인리히 군사 훈장 대십자 그리스도 기사단 훈장 대십자 레오폴트 황실 훈장 대십자 |
가족 관계 | |
형제 | 베르트랑 베시에르 |
사촌 | 쥘리앵 베시에르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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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장바티스트 베시에르는 1768년 8월 6일 프랑스 남부 카오르 근교의 프레사크(Prayssac) 마을에서 부르주아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조아킴 뮈라와 친분을 맺었다.
프랑스 혁명 시기인 1792년, 루이 16세의 헌법 근위대에서 복무하기 위해 파리로 갔으나, 근위대가 해산되고 8월 10일 사건 이후 잠시 몸을 피해야 했다. 같은 해 11월, 프랑스 혁명군에 입대하여 피레네 전쟁에 참전하며 군 경력을 다시 시작했고, 용맹함으로 명성을 얻었다.
1796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하여 로베레토와 리볼리 전투 등에서 활약하며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었고, 그의 경호대 지휘관이 되었다. 이후 이집트 원정에도 동행하여 아크레 공성전과 아부키르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에 참여했으며, 마렝고 전투(1800)에서는 집정관 근위대 부사령관으로 참전했다.[1][2]
1802년 사단장으로 승진했고,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자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어 제국근위대의 기병 총감을 맡았다.[3] 이 인사는 그의 군 경력에 비해 파격적이라는 비판도 있었다.[4] 1805년 레지옹 도뇌르 그랑 테글 훈장을 받았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제국근위대 기병대를 주로 지휘하며 여러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1805),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1806), 아일라우 전투(1807), 프리틀란트 전투(1807) 등에서 활약했다.[5] 1808년 스페인 전역에 파견되어 메디나데리오세코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공을 세웠다. 1809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와 바그람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 공로로 이스트리아 공작(duc d'Istrie) 작위를 받았다.
1811년 다시 스페인으로 파견되었으나 푸엔테스데오뇨로 전투에서의 책임 문제로 소환되었다.[6][7]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는 제국근위대 기병대를 이끌고 참전했다.
1813년 독일 전역 초반, 뤼첸 전투 전날인 5월 1일,[8] 작센안할트주 리파흐(Rippach) 근처에서 정찰 중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향년 44세였다.[8]
2. 1. 어린 시절과 프랑스 혁명 전쟁
장바티스트 베시에르는 1768년 8월 6일, 프랑스 남서부 케르시(Quercy) 지방의 작은 마을 프레사크(Prayssac)에서 부르주아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1] 아버지는 외과의사 마튀랭 베시에르(Mathurin Bessières), 어머니는 앙투아네트 르모지(Antoinette Lemozy)였으며, 총 여덟 자녀 중 첫째였다. 그는 인근 도시 카오르(Cahors)의 왕립 콜레주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 가업을 잇기 위해 몽펠리에 의과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집안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져 학업을 포기하고 아버지 병원에서 조수로 일했다.[12]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1792년 2월, 베시에르는 루이 16세의 헌법 근위대(Constitutional Guard)에 선발되어 파리로 갔다. 당시 각 지방 행정구(department)는 왕에게 충성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가문의 젊은이들을 근위대에 보내야 했는데, 베시에르가 속한 로트(Lot) 행정구에서는 훗날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하게 될 조아킴 뮈라(Joachim Murat)와 장-자크 앙베르(Jean-Jacques Ambert)도 함께 파견되었다. 그러나 왕당파적 성격 때문에 혁명 세력의 의심을 받던 헌법 근위대는 창설 3개월 만인 1792년 5월 29일 해산되었고, 베시에르는 파리의 국민위병으로 편입되었다.
같은 해 8월 10일 사건 당시, 그는 튈르리 궁을 방어하는 작전에 참여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 과정에서 궁을 탈출하려는 귀족들을 도왔다는 의심과 함께, 폭동 직전 살해된 왕당파 지휘관 망다 후작(Marquis de Mandat)과 공모했다는 혐의까지 받게 되었다. 반혁명파로 몰린 그는 몸을 숨겨야 했고, 라 로슈푸코 공작(Duc de la Rochefoucauld)의 도움으로 약 3개월간 은신했다.[13]
1792년 11월 1일, 베시에르는 고향으로 돌아가 피레네 부대(Légion des Pyrénées프랑스어)에 자원입대하며 군 경력을 새로 시작했다. 이후 동피레네군(Armée des Pyrénées orientales)에 배속되어 제22 엽기병 연대(22e régiment de chasseurs à cheval프랑스어) 소속으로 프랑스 혁명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다음 3년 동안 피레네 전쟁에서 스페인군과 싸우며 카탈루냐와 세르다냐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1793년 2월에는 소위로 진급했다. 그의 연대는 불루 전투(1794)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스페인 기병대를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베시에르는 시에라네그라 전투(흑산 전투)와 피게레스 전투, 바스카라 전투(1795) 등에서도 용맹을 떨치며 공훈을 세웠다.
스페인과의 전쟁이 끝난 후, 1796년 대위가 된 베시에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이탈리아 원정에 참전했다. 로베레토 전투에서의 활약은 상관들의 주목을 받았고, 리볼리 전투 이후에는 전투에서 노획한 군기를 프랑스 집정부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보르게토 전투(1796년 5월 30일)에서 그의 용맹함을 눈여겨본 나폴레옹은 그를 사령관 경호대(le corps des guides프랑스어)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는데, 이 부대는 훗날 제국근위대의 정예 엽기병대(chasseurs à cheval de la Garde impériale프랑스어)의 모체가 되었다.[14] 그는 나폴레옹과 함께 슈티리아 침공에도 참여하며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었다.
여단장으로 진급한 베시에르는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도 경호대장으로 동행했다. 그는 아크레 공성전과 아부키르 전투에서 조아킴 뮈라와 함께 싸우며 다시 한번 용맹함을 증명하고 명성을 높였다. 1799년 8월, 나폴레옹이 비밀리에 이집트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갈 때 소수의 측근들과 함께 그를 수행했으며,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에도 참여하여 나폴레옹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 기여했다. 쿠데타 성공 후 제1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새로 창설된 통령 근위대(Garde des consuls프랑스어)의 부사령관으로 베시에르를 임명했다.
1800년 6월 14일 마렝고 전투에서 베시에르는 통령 근위대를 이끌고 프랑수아 에티엔 켈레르만 장군의 결정적인 기병 돌격을 지원하여 승리에 기여했다.[15] 비록 이 전투에서 그의 역할과 기여도에 대해서는 장 란 장군과의 오랜 불화가 시작되는 등 논란이 있었지만, 나폴레옹은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준장으로 진급시켰다.
2. 2. 나폴레옹 전쟁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경호대장으로 동행하여 아부키르 전투에서 조아킴 뮈라와 함께 활약했다. 1799년 8월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떠날 때 동행했으며,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에도 참여했다. 쿠데타 성공 후 나폴레옹이 통령이 되자, 베시에르는 새로 창설된 통령근위대(Garde des consuls)의 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1800년 6월 14일 마렝고 전투에서는 프랑수아 에티엔 드 켈러만 장군을 지원하여 전투 막바지에 기병 돌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15] 그러나 전투의 결정적인 승리는 켈레르만의 돌격 덕분이었으며, 베시에르의 역할은 나폴레옹에 의해 과대평가되었다는 시각도 있다.[1][2] 이 전투의 공적으로 베시에르는 준장으로 진급했다. 1802년에는 사단장(Divisional general)으로 승진했다.
1804년 5월 19일, 나폴레옹은 베시에르를 제국 원수로 임명하고 제국근위대의 기병총감 직을 맡겼다.[3] 1805년 2월 2일에는 레지옹 도뇌르 그랑에글(Grand Eagle) 훈장을 받았다. 당시 베시에르는 소장 진급 2년 차였고 사단급 이상 지휘 경험이 부족했기에, 그의 원수 임명은 나폴레옹과의 개인적인 충성심과 우정에 기반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다.[16] 오귀스트 드 마르몽 장군은 "베시에르가 원수가 될 수 있다면 누구든 원수가 될 수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4]
1805년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베시에르는 제국근위대의 행정과 운용을 총괄했으며,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는 약 9,000명의 근위 기병대를 이끌고 러시아 근위대를 격파하며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입증했다.
1808년, 베시에르는 스페인 전역에 투입되어 에스파냐 방면군(Armée d'Espagne) 제2군단 사령관으로서 스페인 북부 장악 임무를 받았다. 7월 14일 메디나데리오세코 전투에서 앙투안 드 라살 장군의 기병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스페인군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7] 이 승리로 스페인 북부가 일시적으로 프랑스 통제하에 들어왔고,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마드리드에 입성하여 스페인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 부대 지휘에는 다소 느리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여, 곧 근위 기병대 지휘관으로 복귀했다.

1809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다시 발발하자, 베시에르는 그랑다르메의 예비 기병대장으로 다뉴브 유역에서 활약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는 중앙 기병대를 지휘하며 수적 열세 속에서도 방어에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장 란 원수와 다시 갈등을 빚었다. 란은 베시에르가 자신의 부대를 충분히 지원하지 않는다고 비난했고, 두 사람은 결투 직전까지 갔으나 앙드레 마세나 원수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이 전투 직후 나폴레옹으로부터 이스트리아 공작(duc d'Istrie) 작위를 받았다. 이어진 바그람 전투에서는 기병 예비대를 이끌고 돌격하려던 순간 적의 포탄에 맞아 말이 쓰러지는 부상을 입어 지휘를 계속하지 못했다.[18]
1810년, 베시에르는 에스파냐 북부군(Armée du Nord de l'Espagne) 사령관으로 다시 스페인에 파견되었다. 그는 주로 반란 진압 작전을 수행했지만, 포르투갈 방면군 사령관 앙드레 마세나 원수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겪으며 협조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1811년 5월 3일부터 5일까지 벌어진 푸엔테스데오뇨로 전투에서 마세나와 제대로 협력하지 않아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사실상 패배했다.[6] 이 일로 인해 그는 다소 불명예스럽게 소환되어 다시 근위 기병대 지휘관으로 복귀했다.[7]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는 제국근위 기병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말과 식량 부족으로 기병대의 기동력은 크게 저하되었다. 보로디노 전투에서는 나폴레옹에게 근위대를 투입하여 결정적인 승부를 내자는 제안에 반대했는데, 이는 근위대의 전력을 보존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결정적인 승기를 놓쳤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근위대는 이후 베레지나 강 도하 시 후퇴하는 아군을 엄호하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2. 3. 죽음

1813년 전역 초, 조아킴 뮈라 원수가 나폴리 왕국으로 돌아가자 베시에르는 나폴레옹의 기병대 전체 지휘를 맡게 되었다.[19] 그러나 뤼첸 전투가 일어나기 하루 전인 1813년 5월 1일,[8] 리파흐(Rippach) 인근에서 정찰 중 프로이센군 포병대가 쏜 포탄에[19] 가슴 부위를 맞아 즉사했다.[19] 향년 44세였다.[8]
베시에르의 죽음은 근위대뿐만 아니라 전투를 앞둔 나폴레옹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19] 나폴레옹은 가장 충실한 친구 중 한 명을 잃은 것을 깊이 슬퍼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19]
:그는 바야르처럼 살았고 튀렌처럼 죽었다.[19]
다른 원수들은 그의 죽음을 전사에게 어울리는 죽음으로 여겼다.
베시에르의 유해는 5월 3일 파리로 운구되어 앵발리드에 안장되었다.[19] 그의 심장은 따로 보존되어, 현재는 그의 고향인 프레사크(Prayssac)의 생바르텔레미 성당에 있다.[19]
사망 후 베시에르는 정부에게 막대한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자신의 재산을 정부를 위해 탕진했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그의 상속을 감독하고 대부분의 빚을 해결했으며, 자녀들의 미래를 돌보았다. 그의 장남 나폴레옹 베시에르는 루이 18세에 의해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3. 평가
사령관으로서 베시에르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독립적인 군 지휘관으로서는 역량이 부족했다는 평가가 있는데, 이는 나폴레옹의 근위대 사령관이라는 배경 탓에 다른 원수들처럼 폭넓은 지휘 경험을 쌓지 못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스페인에서의 독립 지휘(1808년 메디나데리오세코 전투 승리에도 불구하고)나 푸엔테스데오뇨로 전투(1811) 등에서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뮈라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기병 지휘관이었으며, 제국 근위대를 관리하는 행정 능력도 뛰어났다는 평가도 받는다. 군사 지휘관으로서 신중하고 굳건한 면모를 보여 부대 지휘관으로는 평범했지만 사령관으로서는 뛰어났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나폴레옹 역시 그의 독립 지휘 시도가 성공적이지 못하자 주로 기병 지휘관으로 기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일부에서는 그의 원수 임명이 나폴레옹과의 개인적인 충성심과 우정에 기인한 부당한 영예였다고 보기도 한다. 미래의 원수인 오귀스트 드 마르몽은 베시에르가 원수가 될 수 있다면 누구든 될 수 있다고 말했으며, 실제로 베시에르는 소장 진급 2년 만에, 그리고 사단급 이상 부대 지휘 경험 없이 원수가 되었기에 불만을 품은 장군들도 있었다.[16]
개인적인 면모를 보면, 베시에르는 귀족 출신이 아님에도 신사적인 태도와 외모를 갖추었다.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부하들에게 관대했지만, 자신의 특권과 지위에 대해서는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다. 성격이 청렴하고[9] 마음씨가 좋아 나폴레옹 휘하 원수들 중 가장 신사적이었다는 평을 받으며, 이러한 인품 덕분에 많은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다. 유행이 지난 후에도 ''앙시앵 레짐'' 스타일로 머리를 길게 기르고 흰 가루를 뿌리는 등 외모에 신경을 썼다.
동료들과의 관계에서는 뮈라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으며, 뮈라가 란과 나폴레옹의 여동생 카롤린을 두고 경쟁할 때 뮈라를 지지했다. 반면 란과는 사이가 매우 나빴는데,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직후에는 란이 베시에르의 소극적인 지원을 비난하자 결투 직전까지 갔으나 마세나 원수의 중재로 무산되었다. 1811년 스페인에서는 북부군 사령관으로서 포르투갈 방면군 사령관 마세나 원수와 계속 갈등하며 협력하지 못하는 등, 다른 지휘관들에게는 다소 까다롭고 예민한 동료로 비춰지기도 했다.
4. 가족 관계
베시에르는 1801년 먼 친척인 마리 잔 라페리에르(Marie Jeanne Lapeyrière)와 결혼했다.[20] 그녀는 조제핀 황후의 말벗이었으며, 나폴레옹의 여동생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부인 | 마리 잔 라페리에르 | 1781~1840 | 변호사 장 루이 라페리에르의 딸. 도쿄 후지 미술관에 로베르 르페브르가 그린 초상화 소장.[10] |
아들 | 나폴레옹 베시에르 | 1802~1856 | 정치인. |
베시에르의 동생 베르트랑 베시에르 또한 나폴레옹 전쟁기에 활동했던 장군이었다.
5. 기타
베시에르는 귀족 출신이 아니었지만, 나폴레옹의 가장 가까운 근위대 사령관에 걸맞게 신사의 태도와 외모를 갖추었다. 그는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부하들에게 관대했지만, 자신의 특권과 지위에 대해서는 매우 예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격 또한 청렴[9]하고 마음씨가 좋았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 가장 신사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인품 덕분에 많은 부하들에게 존경받았다. 그는 전형적으로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군(Army of Italy) 시절 옛 가이드(Guides)의 제복을 원수의 휘장과 함께 착용했으며, 후대에 유행이 지났음에도 ''앙시앵 레짐'' 스타일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흰 가루를 뿌렸다.
군사 지휘관으로서는 신중하고 굳센 성격이었다. 이 때문에 부대 지휘관으로서는 평범했지만 사령관으로서는 뛰어났다는 평가도 있다.
장 조아샹 뮈라와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으며, 뮈라와 장 란이 나폴레옹의 여동생 카롤린 보나파르트와의 결혼을 놓고 경쟁했을 때는 뮈라의 편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반면, 란과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
도쿄 후지 미술관에는 화가 로베르 르페브르가 그린 베시에르 부인의 초상화가 소장되어 있다.[10] 또한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외벽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참조
[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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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웹사이트
ベシエール元帥夫人
http://www.fujibi.or[...]
東京富士美術館
2018-11-02
[11]
서적
1957
[12]
서적
Bessières
2013
[13]
서적
Bessières
1990
[14]
서적
1878
[15]
서적
1878
[16]
서적
1973
[17]
서적
2004
[18]
서적
Bessières
2013
[19]
서적
1878
[20]
서적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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